2024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잡색 X’
-당산나무 아래에서 무대로 옮겨 온 풍물굿-
지난 2월, 임실군 필봉리를 찾아 정월 대보름 축제에 참여했다. 아직은 겨울이고 날까지 흐려서 사람들이 몇이나 왔을까 걱정했는데 마을 입구의 길 양쪽은 차들로 빼곡하고 당산나무 아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도시에서 아이들에게 정월 대보름 풍속을 체험시켜주려 찾아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 옛 마을 정취가 그리워 찾아온 중년의 방문객들, 사라져가는 전통문화 현장을 취재하려 찾아온 언론인들, 지역 민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얼굴 내비치러 온 지역 인사들까지 저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필봉리 시골 마을을 찾아왔다.
당산제는 마을 제사와 풍물굿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나무 신에게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올리고 축문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상쇠(양진성)가 이끄는 가락에 맞춰 징과 장구, 소고가 뒤를 따르면 잡색꾼들이 익살맞은 몸짓으로 판의 흥을 돋운다. 당산제 판굿에서 관객과 공연자의 위치는 단차가 없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나무 아래에서 모두가 같은 눈높이로 풍물을 즐긴다. 그리고 어느새 굿이 끝나갈 즈음 관객들은 자연스레 굿판에서 어울렁 더울렁 하고 있게 된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향형인 나조차도 그 무리에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었다. 농악 풍물굿의 매력에 새삼 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관중과 함께 연희하는 무대 ‘잡색X’
임실 필봉 농악이 2024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공연으로 선정되었다. 올해로 22회를 맞이한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판소리와 전통예술을 중심으로하는 공연예술제이다. 특히 올해는 전통 판소리 공연뿐만 아니라 전북의 농악, 풍물굿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개막식 날(8.14) 열린 학술포럼에서는 전북의 농악 전승 담론과 현실에 대한 주제로 열린 토론도 진행되었다.
개막공연으로 선정된 ‘잡색X’는 풍물굿의 잡색 놀음에서 착안 되었다. ‘호남의 잡색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볼 때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봉건적인 인물형과 근대적인 인물형이 나타나고 있어, 시대와 조응하여 잡색이 편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동물형에서 인형에 이르기까지 잡색의 성격화 범주도 넓다. 호남의 잡색들은 풍물잽이가 중심이 되는 공연 구조 속에서 즉흥적이고 상황적인 비양식성의 연행 패턴을 보이기도 하지만, 판굿의 후반부에 구조화된 공연 형식으로 배치'1)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포수, 양반, 각시, 조리중, 할미, 무동 등으로 구성되는 잡색꾼들은 풍물굿의 공연자이자 당대의 사회를 풍자하는 캐릭터이다. 또한 연희자와 관객을 연결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2024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잡색X’를 개막공연으로 선정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개막공연 연출가 적극은 “무대 위에 오브제 유사관객들이 만들어내는 ‘청관중의 전복’은 극장의 현장을 넘어 이 시대의 민중들을 무대로 불러낼 수 있는 상징적 미장센이 될 수 있다” 2) 는 생각에서 본 공연을 기획했다고 한다. 개막공연은 풍물굿이 펼쳐지는 네 장소(당산, 샘, 마을, 굿판)를 무대로 옮겨와 현대적인 오브제들과 소리들로 재해석 되었다.
# 공연의 구성
제1막 당산굿은 상쇠 양진성의 소리로 시작되었다. 커다란 무대를 혼자서 가득 채우는 상쇠 양진성의 목소리는 관객들의 눈과 귀를 무대로 온전히 집중시켰다. 무대 가운데 등장한 목함은 이내 이 땅과 우주를 연결하듯 세로로 세워져 당산나무가 되었다. 제2막 샘굿은 ‘우물에서 얼굴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무대 위에서 드럼세탁기로 재탄생한 그 옛날 마을 샘은 얼굴 없는(얼굴을 검게 칠한) 사람 20여 명을 탄생시켰다. 샘(드럼세탁기)에서 태어난 그들은 역동적인 몸짓으로 생명의 탄생을 표현했다. 제3막 마을굿으로 무대가 전환되자 바닥의 천문도가 마치 하늘의 별자리처럼 천천히 자전하였다. 자전하는 천문도처럼 무대 위의 연희자들 또한 원을 그리듯 회전하며 우주의 섭리를 표현하는듯 했다. 특히 열두발상모춤은 기다란 종이 띠가 공중을 가르는 바람소리와 유려한 곡선들의 향연이 인상적이었다.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대 위의 상모꾼이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보였다.
이제 연희는 절정을 향해 본격적인 판을 벌려 볼 참이다. 제4막 판굿과 제5막 대동굿은 임실 필봉 농악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본 공연의 주제이자 주인공인 ‘잡색’이 제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시대의 다양한 시민들을 상징하는 ‘시민 잡색’들과 오브제들이 무대에서 필봉 농악과 어우러졌다. 해병대원, 의료종사자, 신부, 제주 해녀, 운동선수, 교복 입은 학생, 할로윈 분장한 시민들까지 모두 저마다 한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직업과 계층들 가운데에서도 연출자가 저들을 선택한 의도는 무엇일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이미 공감하였을 것이다. ‘시민 잡색’들을 보며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몇 개의 단어들(코로나 19, 세월호 사건, 이태원 참사, 저출산 문제 등등)이 떠올랐을 것이다.
제5막 대동굿을 마치고 ‘시민 잡색’들과 함께하는 커튼콜
# 연희가 끝나고 난 뒤‘시민 잡색’과 오브제들이 모두 나와 대동굿으로 신명 나게 놀고 난 뒤 개막공연은 모두 끝이 났다. 공연이 정리된 후 잠시 제작 참여자들의 대담 시간이 이어졌다. 대담에서 상쇠 양진성은 이번 공연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밝혔다.
“이번 작품에 참여하면서 참 좋았던 것은 원래 풍물이 가진 개방성이 있어요. (과거에는) 농악이 음악화되어 사물놀이가 나오고 한국의 음악을 세계화하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농악이 이 시대의 것들, 미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훨씬 더 많은 시도도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필봉 농악의 예능 보유자로서 유연하게 참여해보자, 용기 내서 해보자!(생각했습니다.) 다음 후배들은 더 다양한 공간에서 더 많은 시도를 하면서 풍물 활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생각들을 갖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풍물은 연희자와 관객의 눈높이가 같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풍물굿이 한바탕 벌어지면 공연을 하는 자와 즐기는 자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관객은 어느새 굿판의 일부가 된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은 무대 위의 생생한 카메라 시선이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양옆 벽면에는 실시간으로 무대 위의 시점이 중계되었다. 관객들은 무대 위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공연자들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이를 통해 풍물을 무대로 옮겨오면서 생겨난 무대와 객석의 단차를 좁히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연출가 적극은 개막공연으로 임실 필봉 농악을 선택한 이유로 ‘농악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예술이고, 임실필봉농악은 지금 시점에서도 공동체성이 기반이 된 농악팀이기 때문’3)이라고 밝혔다. ‘잡색X’에서 ‘시민 잡색’ 또는 ‘커뮤니티 잡색’으로 명명된 실제 시민 40여 명은 이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를 상징한다. 그들은 개인이면서 또 함께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몸, 하나의 공동체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슬픔과 문제들을 함께 나누는 마음과 용기가 있다.
지역 인문 활동가의 관점에서도 ‘잡색X’ 공연은 새로운 공동체 형태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인문 예술 분야의 활동가들은 각자의 필드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어떤 경우는 존재하며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때가 있다. 나 또한 (생존을 고민하는)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가들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를 고민해왔다. 어쩌면 농악 풍물굿을 보며 그 고민의 해답을 얻은듯하다. 시대를 살아가는 독립된 개인이면서 굿판에서 하나가 되는 잡색꾼들처럼 활동가들에게도 굿판이 필요하다는 생각! 앞으로 인문 예술 웹진 「그라운드」가 우리 지역 활동가들을 위한 ‘굿판’이 되어 함께 대동굿을 치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