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읽기의 즐거움
해마다 연말이 다가올 즈음에 대한민국은 기다리는 소식이 있다. 올해는 누가 노벨상의 영광을 차지할지 기대하며 명망있는 작가의 집 앞에는 기자들이 미리 모여든다. 올해는 모두를 놀래킨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었다. 드디어 한국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 50대 여성, 최초의 아시아 여성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더욱 의미 있는 상이 되었다. 모두 기다리던 소식이었기에 언론과 SNS에서도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크게 다루었다. 뿐만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상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한강의 책을 사기 위해 아침부터 서점 앞에서 오픈런을 하기 시작했다. 맛집도 아니고 서점 오픈런이라니...이런 낯설고 진귀한 풍경을 보는 날이 오다니 정말 상상 이상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요즘 세상보다 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것도 주로 대하 역사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대학 동아리 방에 가면『태백산맥』,『장길산』,『임꺽정』같은 책들이 항상 꽂혀 있었다. 그 당시 조정래 선생의 소설 『아리랑』은 학교에 다닐 때 막 출간되었는데 스토리도 흥미진진하고 전라도 사투리가 맛깔스럽게 표현되서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책을 읽어 나가는 방식도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대학생들 용돈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보니 모든 책을 사서 읽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책 한 권이 나오면 또 다음 책이 나올 때까지 몇 달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형편이 나은 선배가 먼저 책을 사서 읽고 동아리방 한 켠에 있던 넓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렇게 선배가 먼저 읽고 책상 위에 놓고 가면 먼저 발견한 사람이 가져다 읽는 방식이었다. 책을 먼저 읽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이렇게 동아리 회원들이 돌아가며 읽었다. 그리고 책을 읽은 사람들은 밥을 같이 먹거나 둘러앉아 모이면 책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 시절 새 책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애인을 기다리듯 달콤하였다. (이렇게 얘기하면 독서 동아리같지만 사실 내가 활동했던 동아리는 탈춤동아리였다.)
“장편을 읽지 않고선 인생을 논하지 말아라”
얼마 전, 대학 동아리 선후배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장편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 중에 선배 한 분이 장편을 읽지 않고서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하셨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공감하며 얘기가 깊어졌다. 내가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장편은 ‘장길산’이었다. 주인공 길산이 언제 잡힐지 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읽어 나갔던 것 기억이 난다. 많은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잡히지 않고 결국 묘향산을 향해 걸어가던 마지막 장면만큼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많은 사람들이 채 1분 남짓한 휘발성의 영상 지식을 소비한다. 이러한 문화 흐름이 ‘뇌 썩음’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뇌 썩음’을 방지할 방법은 책 읽기에서 찾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장편 읽기를 권한다. 장편은 호흡이 길고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장편을 읽어 나가는 힘이 있으면 삶의 근육도 붙는다. 특히 역사소설 같은 장편을 읽어내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생겨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새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장편 읽기의 즐거움을 알아가기를 바란다.
- 오충렬(전주시평생학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