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인문활동가로 살아남기
연대를 상상하다
그러다 어느덧 졸업은 코앞에 닥치고, ‘나는 이제 뭐해 먹고 살아야 하나’ 막연하게 고민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용하다는 철학관에 가보았습니다. 눈썹 끝이 신선처럼 하얗고 길게 치켜 올라간 철학관 아저씨가 말하길, 제 사주는 배워서 남 주는 팔자라 평생 공부하며 살아야 한다더군요. 그 말에 따르면 선생이 천직이라는 건데 저는 어쩐지 상상만으로도 수명이 줄어들 것만 같았습니다. 학생 때도 일진 애들이 무서워 눈 곱게 깔고 다니던 제가 교탁에 서서 그런 친구들을 지도하라니요. 애초에 교직 이수도 물 건너갔고 교사는 내 일이 아니다 싶어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말은 예언의 힘이 있는걸까요? 아니면 그때 철학관 아저씨가 소문대로 진짜 용했던 건지 저는 지금 철학관 아저씨 말대로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배워서 남 주느라 마흔이 넘도록 여전히 학생이기도 합니다. (저는 주로 생활문화센터와 노인복지관에서 책 수업과 글쓰기, 지역 역사 강의를 하고 대학원에서는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손바닥만 한 이 지역에서 십 년 넘게 활동하면서 이따금 자주 스치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몇 가지 저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좁으면서도 넓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둘째, 그들은 주로 소속 없이 혼자 다니고
셋째, 그렇다고 해서 혼자 독립적으로 일할 수는 없기에 기관을 넘나들며 공존해야만 합니다.
그들과 저는 마치 한려해상 앞바다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 같습니다. 서로 같은 바다 위에 존재하지만 연결되어 있지 않고, 서로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가끔 소식을 듣는 정도의 거리에서 살아갑니다.
아주 가끔 운이 좋으면 규모있는 사업에서 함께 만나기도 하지만 보통은 각자 활동하느라 서로 친해질 기회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보통 활동가들은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속해있는 조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프로젝트들을 준비하고 수행하더라도 일반 회사원들처럼 회식 자리에서 사람들과 소회를 나누고 격려받는 일은 드뭅니다. 기관 담당자분과 참여자분들이 건네는 칭찬의 말도 좋지만 때로는 이 일을 공감하는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민도 오롯이 혼자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개선할 부분은 없는지, 너무 익숙한 방법만 고수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서 자기 확신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활동가들은 소득의 안정, 소속감, 지위 향상을 포기한 채 불안정한 상태를 견디며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존버’하거나 전문직업으로서 강의 또는 작품 생산 및 판매를 통해 안정적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후자 쪽이 활동가들에게는 워너비라 할 것입니다. 결국 직업과 생활의 경계를 오가며 버틴다는 점에서는, 활동가의 목표는 모두 비슷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오랜 시간 계속 해내는 것!
진화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는 오늘날 인류가 진화한 이유는 적자생존의 논리보다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협력에 출중했기 때문’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이민아 옮김, 디플롯, 2021 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친화력, 타인과 연결하며 살아가는 협력, 다정함 덕분에 우리는 멸종하지 않고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경과학과 자연환경에 관한 전제는 차치하더라도 분명 인간의 친화력과 다정함은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서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활동가들은 야생의 동물들처럼 혼자 살아 남아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혼자서 살아남은 활동가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살아남는 동안 성장은 더뎠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쯤 정체되어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백하건데 저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상상해봤습니다. 인류가 축적해온 다정함과 친화력이라는 능력을 우리도 제대로 써보면 어떨까? 망망대해와도 같은 지역 문화판에서 인문예술 활동가들은 어떻게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먼저, 우리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인문예술 웹진 ‘그라운드’, 이 안에서 우리는 함께 만나고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을거라는 기대와 상상을 해봅니다.